포기하고 돌아간 그날 아침

요한복음 21:15-19

2026 부활절

밤새 그물을 던졌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다 소용없는 것 같은 느낌이 밀려올 때가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믿음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달라진 것이 없다. 손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느낌이 찾아올 때, 우리는 대부분 같은 선택을 한다. 처음 자리로 돌아간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다. 누구보다 먼저 고백했고, 누구보다 뜨겁게 따랐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 말을 진심으로 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세 번 부인했다. 숯불 곁에서, 하녀의 질문 앞에서, 자기가 세운 모든 다짐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 빈 무덤도 봤다. 그런데 베드로의 다음 행동은 의외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다시 갈릴리 호수. 다시 어부의 자리.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복음이 아니라 그물을 선택한 것이다.

돌아간 이유를 단순하게 읽으면 안 된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부활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베드로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자기 의, 마지막 자기 힘이 소진된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세 번의 부인 앞에서 완전히 부서졌다. 남은 것은 수치와 무력감뿐이었다.

그래서 돌아갔다. 유일하게 자기가 할 줄 아는 일, 물고기 잡는 일로.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자기 힘이 완전히 바닥난 자리. 그곳에 먼저 와 계신 분이 있었다.

해변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요한복음은 이 숯불을 뜻하는 헬라어 안트라키아(ἀνθρακιά)를 일부러 기록한다. 복음서 전체에서 이 단어가 쓰인 곳은 딱 두 군데다. 하나는 여기, 해변.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 밤, 대제사장 뜰의 숯불 곁이다.

같은 냄새. 같은 온기. 실패의 기억이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자리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직접 만드셨다. 베드로의 상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시키려 하신 것이다.

시몬 요한의 아들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다. 세 번 부인한 만큼, 세 번. 호칭도 의미심장하다.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 요한의 아들’. 실패 이전의 이름, 부르심 이전의 정체성을 불러내신 것이다.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한다. 헬라어 엘뤼페테(ἐλυπήθη). 상처가 열리는 순간이다. 수치스러운 기억이 다시 올라오고, 자기 변호의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자리.

그런데 이 순간이 회복의 관문이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만 했다.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의 앎에 자기를 맡긴 것이다. 자기 변호가 멈춘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됐다.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9

예수님의 결론이 놀랍다.

“다시는 실패하지 마라”가 아니었다. “더 열심히 해라”도 아니었다. “각오를 다지고 돌아와라”도 아니었다. 나를 따르라.”

회복의 형식은 반성이 아니라 사명이었다. 자격이 아니라 부르심이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네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다시 쓰겠다는 선언이다.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불러내시는 것. 그것이 부활의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부활은 무덤이 사건에서 끝나지 않는다.

포기한 사람의 자리에 먼저 찾아오시는 ,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통과시키시는 ,

그리고 다시 따르게 하시는 .

부활은 지금도 그렇게 일어난다.

돌아간 자리가 있다면, 거기서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숯불 냄새가 나는 그 자리. 실패의 기억이 서린 그 자리. 그곳이 끝이 아니다. 부활의 주님은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신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다.

이번 부활절, 그 초대 앞에 서 보시길.

디딤교회

매주일 오전 11시

부활절 특별예배 |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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